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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추천 다큐] `女선교사 조선을 비추다` - 메리 스크랜턴과 로제타 홀 (내레이션: 최수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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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adm** | ||
조회수 | 4,863 | 작성일 | 2015-11-10 |
[女선교사 조선을 비추다] 내레이션: 최수종, 명세빈
자신의 이름조차 갖지 못 했던
조선의 여인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만을 전했던 여선교사들의 이야기
그들이 있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온누리신문·CGNTV 공동기획
조선에 온 선교사 70%가 여성이었다
여성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로제타 홀, 여메례, 박에스더 삶 조명
CGNTV 11월 1일 다큐멘터리 방영 … “몰라도, 잊어서도 안 된다”
최초의 여성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1885년 6월 20일 마침내 그들이 인천에 도착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 52세였다. 메리 스크랜튼은 한국에 온 최초의 여성 선교사다. 그녀는 서울 정동에 자리를 잡고 교육선교를 시작했다.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외국인에 대한 반감으로 여성들과 아이들이 그녀를 피했다. 1886년 5월 31일 드디어 기다리던 첫 학생이 입학했다. 그런데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번째 입학생이 왔다. 학교에 가서 밥이라도 얻어먹으라고 보낸 것이다. 그 학생의 어머니가 찾아와 스크랜튼 선교사에게 “미국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고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약속을 받은 후에 돌아갔다.
세 번째 입학생은 콜레라에 걸린 여성의 딸이었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1886년 정동에서 병원을 만든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의 첫 번째 환자가 되었다. 1887년 명성황후는 이 학교의 이름을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고 지어줬다. 이 학교가 지금의 이화여고와 이화여대의 전신이다.
메리 스크랜튼은 여성 전문 의료기관을 만들기도 했다. 여성들이 남성 의사를 만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들 병원의 공간을 빌려 여성들을 진료했다. 1888년 11월 이화학당의 한 한옥을 개조해 여성 전문병원을 만들었다. 고종은 이 병원의 이름을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고 지어줬다.
메리 스크랜튼은 여성들을 위한 주일학교도 만들었다.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을 보장해 주려는 그녀의 노력 덕분에 많은 여성들이 모였다. 1889년 한해 주일 저녁집회에 참석한 여성이 무려 1,064명이나 되었다. 1889년 2월에는 최초의 여성교회도 설립했다. 이 교회는 당시 조선에서는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메리 스크랜튼은 이화학당이 자리를 잡자 로드 와일러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1891년 안식년을 얻어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간다. 189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도부인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그녀는 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튼과 상동교회를 개척했다. 당시 그녀가 가르친 전도부인은 모두 9명이었다. 그들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1년간 4,000가정을 방문했고, 복음을 전한 여성이 2만 명이 넘었다. 그녀는 노년까지 한국에서 여성들의 교육과 선교에 헌신했다. 1909년 10월 8일 향년 77세의 나이로 상동 자택에서 소천했다.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있다.
여성운동의 선구자 ‘여메례 전도사’
메리 스크랜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한국 여성이 있다. 그녀는 고종 황제 곁에서 영어 통역을 맡았던 여메레(1872~1933) 전도사다. 여메레 전도사는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없었다. 마산의 여 씨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집에서 키우면 일찍 죽는다’는 점괘에 겁을 먹은 부모가 메리 스크랜튼의 집 앞에 버리고 갔다. 여메레는 당시 10대 중반이었지만 부모의 뜻을 거역하지 못했다. 메리 스크랜튼은 그녀를 양녀로 받아들이고 이화학당에 입학시켰다. 세례를 주면서 자신의 이름 메리(Mary)를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부르기 쉽게 ‘메례’라고 불렸다.
여메레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결혼을 했다. 그런데 결혼 3개월 만에 남편이 죽었다. 여메레 전도사는 정동교회에 출석하며 남편을 잃은 슬픔을 극복했다.
여메레는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봉건 사회를 타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1897년 8월 정동교회는 남성 지회 ‘월은회’, 여성 지회 ‘조이스회’를 조직했다. 여메례는 조이스회 부회장이 되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 해 말, 정동교회 봉헌 기념으로 청년회에서 공개 토론회를 가졌다. 주제는 ‘여성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맞나?’였다. 당시 여성 회원들은 방청석에 앉아 있어야 했고, 남성들이 나서서 찬반 토론을 했다. 그때 찬성편에 서재필과 조한규가 반대편에 윤치호와 김연규가 있었다. 당시 윤치호는 여성 교육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다.
“성경에 보면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 인류 타락의 근원이 되었다. 여성에게 지식이 들어가면 좋을 것이 없다.”
성경을 근거로 여성 교육 불가론을 피는 윤치호의 연설에 찬성편의 연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윤치호 쪽으로 기우는 듯 보였다. 그 순간 방청석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록 하와가 죄를 지었으나 마리아가 아니었으면 예수가 어찌 세상에 오셔서 죄를 구원하였으리요. 성경에서 하와만 보지 말고 마리아도 보시오!”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메례였다. 그녀의 발언에 많은 여성들이 박수로 응답했다.
여메례는 가난한 성도들을 도왔다. 생활이 어려운 과부나 부인들을 도와주는 단체 ‘보호여회’를 만들기도 했다. 보호여회가 감리교회 여선교회로 발전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30여 명이 모였는데 현재는 10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 회가 크게 흥하여 여러 만 명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여메례의 창립기도가 이뤄진 것이다.
조선에 특수교육 도입 ‘로제타 셔우드 홀’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선교사는 뉴욕 설리번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1885년 펜실베니아 여자 의과대학에 입학해 공부하던 중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캐너드 챈들러 여사와 토번 여사의 말이 계기가 되었다. 그녀들은 인도에 의료 선교사가 부족한 상황을 설명했는데, 로제타 홀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녀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빈민가 병원에서 근무하게 됐다. 이곳에서 남편 윌리암 제임스 홀을 만났다.
메리 스크랜튼이 만든 ‘보구여관’은 여성 전문병원으로 수천 명의 여성과 어린이들이 몰려왔다. 하워드 박사는 환자들을 돌보다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FMS)는 하워드 박사 대신 로제타 홀을 한국으로 파송했다. 그렇게 로제타 홀은 1890년 10월 제물포 항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특수교육은 로제타 홀로부터 시작되었다. 남편이 평양에서 전도를 한 교인의 딸 ‘봉래’가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로제타 홀이 소녀에게 점자를 알려준 것이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시초다. 로제타 홀은 어릴 적 배웠던 점자를 직접 기름종이에 점을 찍어 가며 가르쳤다. 점자 교육을 시작한지 한 달 만에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발발해 서울로 철수 해야만 했다. 설상가상 남편이 병사했다.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로제타 홀은 미국에서 점자 교육을 다시 받고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했다. 1897년 그녀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녀는 보구여관에서 의료 활동을 하면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자료를 만들었다. 1898년 평양으로 돌아간 그녀는 다시 봉래를 만나 새로운 교재로 교육을 시작했다. 봉래는 다른 시각장애인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교사로 성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시각장애인들이 찾아왔다. 그렇게 한국 최초로 평양학교에 시각장애인반을 개설했다. 청각 장애인과 언어 장애인을 위해 ‘게암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의료활동
수많은 여성 환자들에 비해 여의사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 의사를 더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장로교와 의료 선교사업의 통합을 추진하기도 했다. 의학 훈련반을 개설해 4명의 한국 소녀와 1명의 일본 소녀를 가르치기도 했다.
로제타 홀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의료활동’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여의사 교육을 시작했다. 한국 여성들이 공부해서 조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당시 사회는 여성의 직업참여를 꺼려했고, 여성들도 피를 보는 일을 기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과 설득으로 여러 명의 여성들이 외국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들이 졸업하고 한국에 와서 여의사로 활동하게 됐다.
로제타 홀은 여성의과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다. 한국 의료사역이 자립하지 못하는 이유가 외국인 의사들에게 사역이 집중되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1928년 9월 교육을 시작했다. 여자 의학강습소에서 18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로제타 홀의 이러한 노력 끝에 1934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5명이 의사 자격증을 받았는데 그들은 한국 최초의 여자 의학 교육기관에서 탄생한 의사들이었다.
로제타 홀은 1933년 한국에서 4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아들은 한국 결핵 퇴치에 앞장섰던 셔우드 홀 박사다. 그는 ‘크리스마스 씰’을 만든 장본인이다.
최초의 여성 의학박사 ‘박에스더’
로제타 홀이 ‘보구여관’에서 의학 훈련반을 개설하고 소녀들을 가르쳤다. 그 중 한명이 김점동(박에스더, 1879~1910)이었다. 김점동은 의학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영어 실력이 좋아 병원에서 통역을 하려고 데려온 소녀였다. 어느 날 로제타 홀이 구순구개열 환자를 수술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그 길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김점동은 로제타 홀의 남편인 윌리엄 홀의 일을 돕던 성실한 청년 박유산을 소개받아 결혼했다. 로제타 홀의 남편이 병으로 죽자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나게 되었다. 김점동은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미국으로 함께 떠났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남편의 성인 박과 세례명인 에스더로 이름을 바꾸고 의사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남편 박유산은 로제타 홀의 친정 농장에서 일하며 그녀를 뒷바라지했다.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박에스더가 1900년 6월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기뻐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학위를 받기 20일 전 남편 박유산이 고된 노동 끝에 걸린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박에스더는 남편의 희생으로 얻은 학위로 부귀영화를 좇지 않았다. 안정된 미국의 의사 자리를 마다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통역을 했던 보구여관의 의사가 되었다. 병에 걸려도 남성 의사에게 보일 수조차 없었던 여성들을 도왔다. 열 달 동안 3천 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그 후 로제타 홀이 세운 평양의 ‘기홀 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쉬지 않고 진료했다.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무료로 진료 활동을 펼쳤다. 간호사 양성소를 세우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10여 년을 보낸 뒤 박에스더는 남편을 쓰러뜨린 결핵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잊지 말아야 할 그 이름들
이외에도 잊지 말아야할 여성 선교사들은 한둘이 아니다. 1910년 여성을 위한 국내 유일의 대학과정 이화학당 대학과를 개설한 룰루 E, 프라이(Lulu Edna Frey) 선교사. 교과서 번역, 문서선교, 찬양집 편찬을 한 애니 베어드(Annie L. Baird) 선교사. 수피아 학교와 애양원을 섬겼던 ‘광주의 어머니’ 플로렌스 루트(Florence E. Root) 선교사 등 우리가 몰랐고 잊고 있었던 수많은 여성 선교사들이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녀들의 이름을 불러줘야 할 때다. 그녀들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에 선교의 뿌리가 내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CGNTV가 내한선교사 130주년, 개국 10주년을 맞아 여성 선교사들을 조명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선교토크 ‘여성·사랑·복음’이 바로 그것이다. 진재혁 목사(지구촌교회)와 방송인 이성미가 진행을 맡았다. 이덕주 교수(감신대), 이경숙 교수(이화여대), 박정희 작가(미국 뉴욕주립대) 등이 패널로 출연한다. 선교토크 ‘여성·사랑·복음’에서는 여성 선교사의 역할,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메리 스크랜턴과 로제타 홀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다큐멘터리 ‘여선교사, 조선을 비추다’도 제작했다. 2명의 미국인 여성 선교사와 2명의 조선 의 여성리더를 조명했다. 미국, 일본, 한국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여정이 고스란히 담아냈다. 로제타 홀 선교사의 일기장과 숨겨진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방영
‘여선교사, 조선을 비추다’ 11월 1일(일) 오전 10시 30분
선교토크 ‘여성·사랑·복음’ 11월 1일(일) 오후 8시 30분
출처 : 온누리신문